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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모든것(쓰기)

고졸자가 한달에 1000만원 가까이 벌게된 이야기. 2

by 코딩하는 근근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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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당동 쪽에 있는 그 당시의 서울 3대 공고였던 서울 성동 기계공업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첫 등교날이다. 남자들만 있어서 지하철역에서부터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다.

 

학교는 미리 답사를 해놓은 상태여서 쉽게 찾아갔다. 정문에는 수위 아저씨가 보인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이 아저씨는 대머리였다. 수위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다. 왜 인사를 안 하냐고 그래서 대충 인사를 하고 배정된 반으로 들어갔다. 나는 전기과였다. 전기가 좋아서 전기과를 간 것이 아니라. 공고에서는 그나마 전자과와 전기과를 알아준다고 해서 (그 당시 통념상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냥 들어갔다.

 

고등학교 에서의  얘기는 추후에 다시 써보기로 한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공고에 가서 공부를 해서 특별전형으로 대학을 가라는 계획은 아주 보기 좋게 무산이 되었고..

국어는 왜 배워야 하지? , 영어는 왜? 미국 사람도 아닌데 , 수학은 계산기 쓰면 되지 내가 코사인, 탄젠트 , 미분 , 적분 배워서 뭐하게?  전기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고 이런 마음에 공부는 접었다. 이쯤 해서 어머니께서도 포기하셨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특별전형은 이미 손 놨고 수능을 봤다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못 봤다. 

그렇게 대학 진학의 꿈(어머니의 꿈) 은 물 건너갔고 이제부터 무얼 하고 먹고살아야지?라고 생각을 해봤지만 답이 없었다.  그렇다 부모님의 따뜻한 그날 아래서 철없이 놀고먹기만 했다. 어렸을 적엔 몰랐다. 그게 얼마나 큰 그늘이었는지.

 

건설현장 조경공사, 노래방 알바 , 홀서빙 등 되는대로 아르바이트식으로 일을 해보았지만 다 나와는 맞지 않았고 결국에는 도망을 결심하게 되었다.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직업전문학교를 다니겠다고 도와달라고 하였고 그러라고 하셨다. 

 

이미 미리 알아봐 놓은 학교가 있어 그곳에 입학하기로 했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중학교 때 그나마 가장 잘했던 거 컴퓨터 쪽이어서 인터넷정보과로 결정을 했다. 물론 사실 이것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1년 동안 술 하고 놀이의 대 향연이었다. 출석도 겨우 맞출 정도로 또 위기의식 없이 부모님 그늘 아래 서서 놀기만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고 입영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병무청의 통지를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청년기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다 "도피의 대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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